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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 서양 문명에 대한 정의
먼저 서양문명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쉽게 떠오르는 지역은 서유럽일 겁니다. 실제로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이 세계를 좌지우지하던 20세기 중반까지만해도 서양문명이란 곧 서유럽 문명을 뜻했습니다. 그리고 이 서유럽 문명의 뿌리는 어디까지나 그리스 로마 시대에 국한되어 있었죠.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미개한 중동 문명과 위대한 서양문명 사이에 명확한 선긋기를 함으로써, 그 밖의 문명들에 대한 유럽문명의 우월성을 반증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고고학적 증거가 쌓이고 수많은 연구결과가 축적되면서 그리스 로마 문명이 이집트 및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결코 독립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 문명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으로부터 여러 문명을 수입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이 현재는 정설로 대접 받고 있죠. 문자, 종교, 수학, 천문학, 공학 등 중동문명의 유산은 그리스 문명으로 충분히 이어졌으며, 실질적인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인식되기 때문에 최근 서양사학계에서는 서양문명의 정의를 점차 넓히는 추세에 있는 것이죠.
이러한 흐름을 감안하여, 본문에서 "서양"은 <새로운 서양 문명의 역사>에서 정의되는 바와 같이 기원전 3500년에서 서기 500년 사이 지중해 부근에서 발달한 주요 문명들을 가리키는 지리적 명칭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서양 문명은 그리스 문명 뿐만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을 포괄하는 복수형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즉, 다수의 서양 문명이 있었고 이들이 상호작용함으로서 오늘날의 서양문명의 초석이 형성되어 왔다는 것이죠.
이렇게 복수의 문명을 서양문명이라고 묶어놓는 것에 비해, 그 비교대상이 되는 중국은 하나의 문명이니 공정성이 상실되어있지 않는가 하는 지적이 나올수도 있습니다. 다만 고려해야할 점은 중국 문명 역시 단독 문명이 아니라 현재의 중국 영토에 기반한 모든 문명의 묶음체를 뜻한다는 사실입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황하 문명, 장강 문명, 북방 동북 지방의 요하 문명, 파촉 지방의 쓰촨 문명 등 중국 대륙에 존재했던 복수의 문명이 융합한 존재가 바로 중국문명입니다. 또한 강역의 넓이나 인구 규모 및 기원 전후의 발전양상을 고려했을 때, 서양문명과 중국문명의 비교는 공정성을 크게 훼손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근대 이전까지는 중국문명이 서양문명보다 앞서 있었을까?
대한민국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동양 문화권에 속해있었던 국가였습니다. 먼저 지리적으로 유라시아 반도의 동쪽 끝에 위치한 데다 동양의 문화적 중심지인 중국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으니까요. 이런 까닭에 좋건 싫건 간에 한반도에는 중국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는 중화사상이 적지않게 영향을 끼쳐왔으며 그중 일부는 심지어 오늘날에까지 자취를 남기고 우리의 현실 인식을 좀먹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전근대 시기에는 중국문명이 서양문명보다 앞서 있었다." 라는 인식입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 고정관념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팩트를 짚어보자면 이런 인식은 그야말로 넌센스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그리고 확고하게 염두(念頭)에 박아두어야 할 팩트는 우리 인류는 동아시아에서 진화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약 30만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출현했습니다. 이윽고 아프리카를 벗어나게 된 시기는 대략 10만년 전이라고 추정되며, 이때부터 인류는 전세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점의 인류는 석기와 불을 다룰 수 있었지만 농경기술은 없었기 때문에 수렵과 채집 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이 때문에 인간이 모여 살수 있는 영역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즉, 농경이 발달하고 문명이 등장하기 전까지만해도 동양이든 서양이든 생활수준이나 인구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농경과 문명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농경 자체는 전세계 각지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이 중론이지만, 가장 빨리 문명을 일궈낸 지역은 다름아닌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입니다. 이 두 문명은 기원전 40세기경부터 시작되었다고 추정되며 이는 인더스 문명(33세기), 황하 및 장강 문명(20세기)에 비하면 확실히 빨랐습니다. 그리고 인구증가의 스노우볼링에 있어서 시작이 빨랐다는 점은 어마어마한 메리트로 작용했는데, 중국에서 슬슬 문명이 시작되는 바로 그 타이밍에 이미 이집트의 모든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는 완공된 상태였던데다 구시대의 유물 취급을 받고 있었을 정도입니다.
가장 유명한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기원전 2550년에 지어졌는데, 이 시점의 중국은 문명 성립도, 청동기 시대에도 진입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즉, 고대를 기준으로 보면 중국 문명은 서양 문명에 비해 발전 단계에서 압도적으로 뒤쳐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명심해야할 점은 중국인들이 메소포타미아인들이나 이집트인들에 비해 게으르거나 무능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인류의 발상지인 아프리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문명을 일으켰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아프리카로부터 매우 먼 동아시아까지 이주하는 과정에서 소모된 시간이 많았기에 시작 시점이 더뎠고, 그것이 문명 초기 단계에서는 매우 크게 작용했던 것이죠. 따라서 중국문명에 비해 서양문명이 초기 발전 단계에서는 빨랐지만, 그렇다고 이 사실이 중국문명에 대한 서양문명의 우월성을 반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이후로도 서양문명이 중국문명에 비해 발전단계에서 앞서 있었던 구도는 한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뚜렷한 고고학적 증거가 없는 하나라는 둘째치고 중국 역사의 기틀을 닦았다고 평가받는 상나라나 주나라조차 실질적인 통치력이 미쳤던 지역은 황하 유역의 중원지역 일부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중국이 황하 유역에서 꾸물거리고 있었을 때 서양에서는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이집트 신왕국, 그리스의 미케네 문명, 소아시아의 히타이트 제국, 메소포타미아의 아시리아 제국이 세계 패권을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었으며 함무라비 법전(BC 1750년), 이집트와 히타이트 간의 카데시 전투(BC 1274년), 트로이 전쟁(BC 1194년 ~ BC 1184년) 같은 세계사적인 빅 이벤트들도 절찬리에 개최되고 있었죠. 이 시기 중국은 통일은 커녕 제자백가가 등장하거나 춘추전국시대가 개막하기도 전이었죠.
그러나 결국 서양 문명권도 기원전 10세기를 기점으로 주춤하게 되었고 진나라에 의한 중국 통일을 기점으로 거의 동률을 이루다가, 로마 제국이 쇠퇴함에 따라 완전히 역전당하게 됩니다. 시작 우위를 가져갔던 서양 문명이 중국 문명에 비해 훨씬 유리했을텐데 대체 어쩌다가 뒤쳐지고 말았을까요? 가장 먼저 거론해볼 수 있는 이유는 중국의 지리적 요건이 너무나도 좋았다는 겁니다. 특히 중원지역은 강을 끼고 있는 넓은 평야였으면서도 매우 비옥도가 높았기에 인구부양력 면에서는 나일강 유역이나 비옥한 초승달 지대 이상이었습니다. 또 춘추전국시대가 개막되면서 각 나라들이 생존을 위해 부국강병에 절치부심하게 되었고 이에 제자백가를 위시한 학문적 발달이 더해짐으로서, 비록 시작은 늦었더라도 그 발전속도가 엄청나게 가속화된 것입니다.
반면 서양 문명은 부국강병은 커녕 대재앙에 직면했습니다. 바로 바다 민족(Sea People)이었죠. 이 바다 민족에 대해서는 아직도 불분명한 점이 많은데 바로 그 이유는 이들과 마주친 문명이 이집트와 아시리아를 제외하면 모두 전멸했기 때문에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입니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미케네 문명과 카데시 전투를 통해 이집트를 무릎꿇리고 세계 패권국으로 발돋움한 히타이트 제국조차 이 바다민족의 대침공(BC 13세기말 ~ BC 12세기 초)으로 인해 멸망당했습니다. 또 이들은 나일 강을 통해 이집트에도 침략해 최전성기를 달리던 이집트 신왕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혔으며, 이를 기점으로 이집트는 세계사의 중심지 역할을 영영 상실하고 맙니다. 학계에서는 이 시기를 오리엔트 지역에서 후기 청동기 문명이 붕괴한 시기로 간주하고 있을 지경입니다.
정리하자면, 기원전 10세기 이전의 고대를 기준으로 봤을 때 서양 문명이 중국 문명보다 훨씬 더 발달했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서양 문명은 바다 민족의 대침공이라는 아포칼립스적인 상황을 맞이해 문명의 쇠퇴를 경험한데 반해, 중국은 춘추전국시대 같은 전란의 시기는 있었지만 경쟁을 통한 부국강병의 노력과 중원지역의 지리적 이점을 살려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죠. 그 결과 동서양이 처음으로 서로의 존재를 인식했던 한나라 때는 이미 균형추가 중국쪽으로 조금씩 기울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이에 더해 유학의 영향으로 중국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는 중화사상이 대두되었고 이것이 우리나라에까지 퍼지면서 "산업혁명 이전까지만해도 중국 문명이 서양 문명보다 앞서 있었다." 라고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말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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