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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니메이션, 드라마, 소설 등 무수한 매체에서 무수하게 등장하는 악당들 중 대다수는 세계 정복을 노리며 오늘 하루를 암약하고 있습니다. 비단 픽션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진심으로 군사적 세계 정복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은 적지 않았고, 그 중 일부는 약간이나마 그 꿈에 가까이 접근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났으며, 군사적으로 전지구상의 국가나 집단들을 실질적으로 통일시킨 예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체 왜일까요?
사실 세계 정복에 근접한 사례를 분석해보면 실패 원인은 여럿 존재합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 나치 독일, 공산주의처럼 국력 팽창으로 주변국의 어그로를 완전히 끌어버렸거나, 대영제국처럼 강력한 라이벌을 압도하지 못했다거나 아니면 알렉산더나 칭기스칸처럼 한 사람의 카리스마적 존재감에 전적으로 의존했다가 수명 문제로 무너진 경우 등 각양각색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례들이 필연적으로 안고 있는 공통적이면서도 필연적인 요소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만 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근대 시기에는 왜 세계 정복이 불가능했을까?
오늘날에는 경제력, 기술력 등 수많은 요소가 끼어들어 있지만, 적어도 전근대 시기까지만해도 한 국가가 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히고 인구를 늘리면 국력이 강해지는 것은 진리였습니다. 국력이 강해지면 강해질 수록 타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확률은 높아지고, 이로 인해 영토를 더 넓히고 인구를 더 늘려 국력을 더욱더 신장시킬 수 있게 됩니다.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는 이러한 스노우볼링이 흔히 나타나며 실제 역사에서도 이런 현상은 나타났습니다.
문제는 영토확장과 인구증가로 인해 국가의 체급은 비대해질 수 있을지 몰라도, 그렇게 비대해진 국가의 힘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또 외부에 투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전근대 시기에는 교통기술이 부족한 지라 국토 면적이 넓어질수록 거리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맙니다. 이 탓에 지방에서 세금을 거둬들여도 그 세금을 중앙으로 이동시키는 과정에서, 걷은 세금보다도 더 많은 비용이 발생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죠.
이런 현상을 근본적으로 없애려면 지방의 세금을 지방에서 소모하는 방식을 취해야만 했는데, 이 경우에는 영토확장에 의한 국력증대라는 의미가 퇴색될 뿐더러 자칫하면 독자적으로 힘을 키운 지방세력의 반란이라는 리스크를 짊어져야만 했습니다. 또 거리에 의한 통신 문제도 상당했습니다. 일례로 임진왜란 당시 부산에서 서울까지 파발이 도달하는데 약 3.5일이 걸렸는데, 조선처럼 비교적 영토가 협소한 나라조차 이랬을 정도니 다른 제국들은 말할 필요도 없겠죠.
정리하자면 "영토확장->국력증대->전쟁승리->영토확장" 이라는 스노우볼링 자체는 유효했습니다. 하지만 교통과 통신이라는 두 가지 제약 때문에 발생하는 필연적인 비효율 탓에 확대된 국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데는 한계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토 확장의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시점부터 추가되는 영토는 제국 팽창에 유용하기는 커녕 유해한 요소로밖에는 작용하지 않게 됩니다. 이 때문에 전근대 시기에 존재해왔던 무수히 많은 천재적인 관료와 정치가들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골머리를 싸맸습니다.
이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은 그 누구도 낼 수 없었지만, 영토 확장의 공세종말점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대안적으로나마 도달한 결론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중앙집권제도였지요. 전근대 시기, 무수히 많은 왕국과 제국들이 있었고 그 통치계급들이 채택한 통치체제 역시 서로 달랐지만, 그 중 비교적 장기간에 걸쳐 제국이라고 불릴만큼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던 국가들이 하나같이 중앙집권제도를 취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에 가까운 통치체제를 취하고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죠.
오늘날에는 왜 세계 정복이 불가능한가?
그러나 현대 시점에서는 과학의 발달로 인해 상기한 교통과 통신의 제약은 이제 거의 다 극복된 상태입니다. 조선시대 때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최단 3.5일이 걸렸는데, 오늘날은 자동차로 5시간 정도 걸리죠. 또 전근대 시기에는 지구 반대편까지 그저 이동만 하는데도 최소 반년 가까이는 걸렸을 테지만, 오늘날은 비행기로 하루나 이틀이면 충분합니다. 통신은 더더욱 극단적인데, 지구 반대편에 있더라도 이메일은 고작 수초 내에 도달하죠. 이런 상황이기에 사실상 영토 확장의 공세종말점은 적어도 지구상에서는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정복은 여전히 요원해보입니다. 그 이유 중 하나로 지목되는 것은, 현대 국가 중 대다수는 민주화를 거쳐 사유화(私有化) 단계에서 벗어났다는 점입니다. 즉, 정책결정론자들은 국민들의 이해관계를 최우선시하게 되었기에 과거처럼 국가를 지배하는 엘리트 계층이나 극소수의 위정자들의 지배욕을 채우기 위해 무리한 군사 원정을 강행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반면, 전쟁과 정복같은 비효율적인 수단을 동원하기 보다는 경제력/기술력 강화를 통한 국민들의 생활수준 향상을 도모하는 경향이 커졌죠.
그런데 무역자유화와 세계화를 통해 세계의 주요 경제권이 사실상 하나로 묶여버렸고 국제 분업이 너무나도 당연해지고 국가간의 경제협력이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하기 시작하면서, 전쟁이라는 행위의 역기능이 더욱 증폭되고 맙니다. 실제로 무역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미국마저도 중국산 공산품 없이는 민생이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기에, 미국-중국 무역 전쟁 속에서도 중국산에 관세를 부과하면 부과했지 수입금지조치를 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사드 사태 이후 한국을 계속적으로 압박하고 있는 중국조차도, 한국산 수입 중간재 없이는 경제에 애로사항이 꽃피는 것이 현실입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전쟁을 벌여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폐허가 된 영토나 지하자원 정도이기에, 전쟁에 의한 경제적 타격이나 국가신인도의 저하 등을 감안하면 군사 원정은 이젠 안하니만 못한 결과가 나오고 맙니다. 또 근대 이후 전세계적으로 민족주의가 태동함으로서 영토 확장에 따른 리스크가 매우 커졌기에, 다대한 희생을 치루고 어떻게든 얻어낸 영토에서도 민중들의 극심한 반발에 직면하게 되는 점도 세계 정복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지적됩니다. 즉, 과학 발전으로 인해 전근대 시절에 문제가 되었던 통신과 교통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다른 문제들이 대거 등장하는 바람에 세계 정복이 달성되지 못하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결론
전근대 시기에는 교통과 통신의 제약으로 인해 국가의 영토가 팽창할 수 있는 영역이 한정적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몽골 제국처럼 돌출된 군사력을 통해 일시적으로 매우 광대한 영역의 패권을 확보하는 케이스는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그것을 오랜 세월에 걸쳐 유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지요. 그러나 근대 이후 과학문명이 발달하면서 상기한 통신/교통에 따른 제약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근대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만들면, 제일 처음 나서는 행동이 바로 도로와 철도를 설치하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소위 "빨대를 꽂는" 행동은 결국 영토 확장의 경제력 환원률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해 영토 확장의 경제력 환원률이 높아져 "영토 확장=막대한 이익"이라는 도식이 성립되고, 특히 원양 항해술의 발달로 인해 전세계를 무대로 군사 원정을 감행할 수 있게 되면서 유럽 제국들은 엄청난 제국주의적 야욕을 전세계에 투사하게 된 것이죠. 그러나 현대에 이르면 지구촌 각 지역에서 민족주의가 발달하거나, 세계화로 인해 영토 확장이 갖는 디메리트가 매우 커졌기에 영토 확장의 경제력 환원률은 다시금 위태로워졌습니다. 이에 쐐기를 박듯,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패권국으로 떠오른 미국이 세계 정복의 비효율을 깨닫고 외국을 무력침탈하여 자국 영토로 편입하기 보다는 친미 정권을 수립시키는 방향으로 선회했기 때문에, 세계 정복이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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