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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제라고 하면 왜인지 현대적이지 않고 진부하며, 아날로그 적이면서도 효율이 굉장히 나쁠 것 같은 이미지가 있습니다. 실제로 현재도 기능하고 있는 대다수의 관료제는 서면보고나 대면보고를 중시하거나 이를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효율이 낮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물까지 열악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관료제가 그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INDEX
1. 일본 관료제는 효율적인가?
2. 일본 관료제는 어떻게 기능하는가?
3. 일본 관료제의 한계
1. 일본 관료제는 효율적인가?
일본 국내에서도 관료 계층이라 하면 뭔가 세금 도둑놈 같은 인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관료제는 부정부패도 거의 없을 뿐더라,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게 기능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예를 들면 지진이나 태풍과 같은 국가적 재난상황이 발생했을 때, 일본 당국의 대처 속도 및 대처방법은 세계적으로 볼때도 매우 우수한 수준입니다.
우스개 소리이긴 하지만 다른 나라의 여행자들 중에서는 여행지에서 재난에 조우하게 되면 먼저 일본 여행자를 따라가면 살아남을 수 있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일본공관은 비상사태에 대한 대비가 다른 나라에 비해 비교적 잘 되어 있고, 자국의 여행자들에게 안전한 피난경로를 통지하는 속도도 빠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관료제는 효율적일까요? 이것을 따지려면 먼저 "효율"이라는 단어를 정의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효율"이란 어떤 일을 얼마나 빨리 처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정도를 뜻합니다. 또 "효과"라는 말도 있는데 "효과"란 어떤 일을 처리한 후, 그 결과가 얼마나 좋은가에 대한 정도를 의미합니다. 즉, 효율성이 높다는 말은 정해진 시간 내에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효과성이 뛰어나다는 것은 처리한 일의 결과가 훌륭하다는 의미입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일본의 관료제는 틀림없이 매우 뛰어난 효과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효율성은 어떨까요? 일본 정부의 관료기관은 대부분 전자화되어 있지 않으며, 아직도 1970년대 같은 수신호, 유선전화, 우편, 대면접촉, 종이 서류 보고 등과 같은 아날로그적인 방법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안건을 결정할 때, 회의를 위한 회의, 보고를 위한 보고를 하는 등 의사결정 속도가 매우 느립니다. 즉, 일본 관료제의 효율성은 낮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일본관료제는 어떻게 기능하는가?
이렇게까지 전자화도 되어있지 않으며 아직까지도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재난 사태에 대한 대응은 빠른 걸까요? 정답은 메뉴얼화 입니다. 일본은 철저히 메뉴얼에 의해서 움직이는 나라입니다. 이 메뉴얼이 일단 만들어지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됩니다. 전례들을 모아 검증하고, 그 검증된 결과를 토대로 가장 효과적인 방식을 생각해내야만 하죠. 그리고 이것에 빈틈은 없는가. 예외 상황은 없는가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또 다시 전례를 모으고, 검증을 하고... 거의 끝판왕급 노력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단 메뉴얼이 만들어지면 그 다음부터는 그 메뉴얼에 쓰여진 대로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뿐만으로도 효과적인 대응이 가능해 집니다. 또 이 대응 메뉴얼 그 자체의 구조도 대단히 치밀하기 때문에, 거의 모든 긴급상황하에서의 대처법이 리스트화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진이나 폭풍, 폭동 등과 같은 의외의 비상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위기 관리 시스템이 신속하게 발동되어 국민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본 정부의 위기관리 시스템은 완벽한 메뉴얼을 만들어내기 위한 관료들의 노력의 결실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애초에 일본 관료제의 근본이 되는 시스템 자체는 미군정에 의해 도입된 것이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약 50년간 기본적인 틀이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료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충성심과 책임감을 발휘하여 이 정도로 완벽한 수준의 위기관리 시스템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리고 관료들이 이렇게까지 충성심과 책임감을 지니게 된 배경에는 종신고용제를 통한 고용안정성의 제공에 있습니다. 즉, 조직원들에게 안정감을 제공해, 조직에 대한 소속감을 고양시키는 것으로, 조직원 개인개인이 자신의 권한을 사적으로 이용하기 보다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도록 유도해낼 수 있었던 겁니다.
3. 일본 관료제의 한계
일본 관료제의 최대의 약점은 메뉴얼이나 전례가 없으면 매우 매우 무능해진다는 점입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같은 전례 없는 규모의 대참사가 발생한 경우, 절망적일 정도로 대처속도가 느리며 허둥지둥하게 됩니다. 특히 관료제의 특성상, 최일선에서 현장의 상황을 파악하고 긴급대처를 실시해야할 현장 책임자에게 긴급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사전에 허락된 수준 이상의 권한을 부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현장책임자가 실질적으로 대처하려고 하면, 상급자에게 연락하여 그 권한을 허가받아야만 합니다. 문제는 그 연락 방법이 유선전화, 대면접촉, 서면보고 등의 극도로 아날로그적인 방식이므로, 의사결정의 속도가 파멸적으로 느리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전례 없는 수준의 재난상황에서 골든 타임 내에 대처하는 것이 불가능해져 사건의 조기진압에 실패하게 되는 경우가 잦습니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말할 수 있겠죠.
이렇듯 일본 관료제는 철저히 매뉴얼과 선례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임기응변이 요구되는 상황에 극도로 취약합니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유망한 아이디어가 있더라도, 선례가 없으면 일단 움직이지 않습니다. 반대로 어떻게든 선례를 만들면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즉, 자신이 책임져야할 일이라면 전력을 다해 해내지만 그렇지 않으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거죠.
재미있는 점은, 이 부분에 있어서 한국과 일본은 정반대라는 겁니다. 한국에서는, 하급자에 대한 최악의 평가가 "시키는 일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하급자가 듣는 최악의 평가는, "왜 맘대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냐" 입니다. 아무리 결과가 좋다라도 상급자가 허가하지 않은 일은 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반대로 그러한 비효율적인 의사결정 과정 탓에 발생한 손해에 관해서는 조직 그 자체의 병폐이므로 조직 전체가 지므로, 개인의 책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장 담당자는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선조치 후보고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이 탓에 전례없는 사건의 조기 진압은 영영 불가능해지는 것이죠.
물론 일본 관료들도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례 없는 재난이 발생한 후에는 철저히 그 사건을 연구 및 규명하고, 철야를 해서라도 신속히 대응 매뉴얼을 마련합니다. 즉, 일본 관료조직은 “한 번 당한 일은 두 번 다시 당하지 않는” 시스템 구축하는데 있어서, 아주 효과적인 조직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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