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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생각하는 일본은 "전쟁의 나라", 일본인이 생각하는 일본은 "평화의 나라"
먼저 일본인은 기본적으로 자국을 "평화의 나라"라고 인식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이런 인식에 선뜻 동의하기 힘들겁니다. 왜냐하면 한국인의 머릿속의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거나 개입해온, 극도로 호전적인 국가니까요.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전쟁들을 보면 일본은 평화의 나라다 같은 소리는 절대로 나올 수가 없죠. 오히려 이 시절 일본에 의해 억울하게 침략당했던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 그 중에서도 임진왜란 때도 피해를 입은 한국에게는, 제대로 사죄도 하지 않은채 평화의 나라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일본의 모습은 절대 달가워 보일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일본 측이 주장하는 평화의 논리에도 허점이 많은 편이구요.
그러나 제3자가 바라보기에 일본은 평화로운 나라라고 인식됩니다. 호주 싱크탱크인 경제평화연구소(IEP)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 평화 지수(Global Peace Index)에 따르면, 2020년 일본의 GPI 순위는 세계 9위로 조사대상국 163개국 가운데서도 최상급의 평화지수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 통계의 세계 1위는 아이슬란드, 2위는 뉴질랜드이며 중립국으로 유명한 스위스는 10위로 무려 일본보다도 한 단계 낮은 상태이죠. 반면 한국은 48위로 집계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낮은 순위는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감안하면 어떻게든 납득할 수는 있겠지만, 일본이 9위라는 점은 도대체가 납득할 수가 없어보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인이 보기에는 일본은 과거사도 제대로 청산하지 않고, 근대 일본 제국주의 시절에 저지른 악행도 무수히 많은데다가 걸핏하면 극우발언이 터져나오는 나라이니까요. 그러니 일본이 평화라는 측면에서 어째서 이렇게까지 고평가를 받고 있는지를 도저히 알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다보니 도리어 이런 통계를 내놓는 호주의 경제평화연구소가 일본으로부터 뒷돈이라도 받은게 아닌지 의심스러워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죠. 사실 이런 괴리가 발생하는 이유는 비교적 간단합니다. "일본은 평화의 나라이다" 라는 명제에 직면하였을 때, 한국인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근대 시절의 일제의 만행이니까요. 그러나 "일본은 평화의 나라이다" 라는 명제를 세계인들이 보게 되면, 근대에 존재했던 대일본 제국이 아니라, 현대국가인 일본에 가장 크게 초점을 맞춥니다.
일본인은 왜 자국을 "평화의 나라"라고 생각할까?
과거 일본은 2차 세계 대전 직후, 패전국가로 전락하였고 그 뒤로는 미국이 주도하는 전후질서에 철저하게 순응하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1947년, 미일 동맹이라는 방파제 아래에서 전쟁과 무력행사를 영구히 포기하는 평화헌법을 제정하였고, 베트남 전쟁이나 중동 전쟁 등에 간접적으로 가담하였을 뿐, 자위대를 파견하는 등 직접적인 가담은 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데도 큰 진통을 겪지 않았기에, 명목상 내전도 외전도 없는 상태를 지금까지 약 70년 이상 계속적으로 유지해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이 그대로 통계에 반영되었던 것이죠. 다만 한국 입장에서는 GPI에서는 간과되고 있는 일제 시기와 전근대 시기의 역사적 배경이나 한일간의 지정학적 특성을 고려하여 일본이라는 나라의 위험성을 느끼게 되니, 일본이 세계에서 아홉번 째로 평화로운 나라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죠.
다만 한국인이 일본을 어떻게 인식하건 간에, 일본인이 자국을 "평화의 나라"라고 인식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일본 외무성의 공식 입장인 <평화국가로서의 60년의 걸음(平和国家としての60年の歩み)>를 보면 알 수 있듯 전후 일본은 과거의 일본 제국 시절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평화헌법의 제정과 그 배경에서 보여지듯 평화주의는 전후 일본 사회가 명목상 내건 임시 간판이었습니다. 평화헌법으로 무력을 영구히 포기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미일동맹이라는 든든한 방어막이 일본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었던 것이며, 냉전질서 속에서 태어난 일본의 평화주의노선은 필연적으로 모순과 불완전성을 내포할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이 평화헌법과 미국 덕분에 안보에 대한 걱정없이 경제발전에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할 수 있었고, 이 덕분에 일본은 세계 3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또 이러한 사회적 흐름 속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베이비붐 세대들이 일본 사회의 주류를 차지하기 시작하면서 일본인은 당연한 듯이 자국을 평화의 나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즉, 평화 논리에 결함이 있고 모순이 있다고 한들, 타당성이야 어쨌든 현대 일본인들의 대다수는 "일본은 평화의 나라이다"라는 명제를 이미 오래전에 받아들였으며, 지금에 와서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로까지 체화되어 있기까지 합니다. 이렇다보니 평화헌법을 수정하여 보통국가로 바뀌려는 움직임에는 우익정당인 자민당 내에서조차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이죠. 물론, 한국 언론은 이를 쏙 빼놓고 다루지도 않는 터라 대다수의 한국인은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지도 못하지만요.
아무튼 그런 까닭에 오늘날 일본 극우인사들조차 일제 시절에 저지른 만행을 합리화할 때, "서구열강으로부터 아시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같은 어처구니 없는 변명을 내놓고 있는 것이죠. 왜냐? 이들의 인식으로는 일본은 언제까지나 평화의 나라이어야만 하니까요. 만약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을 침략했다는 사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일본은 평화의 나라이다라는 정체성이 붕괴하고 말기에, 이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가 아니죠. 그러나 극우가 아닌 정상적인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 일본인이라면, "일본은 평화의 나라이다" 라는 명제를 평화헌법이 제정된 현대 일본에만 한정짓지, 태평양 전쟁 이전 시기인 일제시대까지는 소급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명확히 선을 긋습니다. 문제는 위와 같은 극우인사들의 발언이 너무나도 강렬한 나머지, 대다수의 상식있는 발언들은 기억 속에서 잊혀지거나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죠.
정리
한국인은 일제 시절의 역사를 현대 일본에 투영해보기 때문에 일본을 평화의 나라라고 인식하기도, 납득하기도 힘듭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일제 시절과 현대 일본을 구분하고 있으며, "일본은 평화의 나라이다" 라는 명제는 극우세력이 아닌 이상 어디까지나 현대 일본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는 현재 한국정부가 대한제국과는 별개이며, 조선왕실을 중심으로 한 전제 군주국가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표방하고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다"라는 명제가 성립된 시기는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민주주의가 대한제국시절까지 소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똑같은 맥락에서 일본인이 "일본은 평화의 나라이다" 라는 명제라는 접하면, 기본적으로 현대 일본만을 배경으로 삼아 이를 이해합니다. 애초에 일본인이 자국을 평화의 나라라고 인식하는 가장 큰 계기인 평화헌법은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제정된 것이었으니까요. 한국인의 경우, 현대 한국과 대한제국을 일제강점기라는 단절을 통해 아주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한편 일본인의 경우에는 GHQ시기를 일본 제국과 현대 일본을 구분하는 단절의 시기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만 양자의 차이점은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나긴 투쟁의 역사를 거쳐 자의적으로 쟁취된 것인 반면, 현대 일본의 평화주의는 미국의 사정에 의해 타의적으로 이식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 때문에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운동과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 반대 시위에 대해, 한일 양국의 대중들이 보여준 적극성이 분명한 차이를 보였던 것이구요.
그러나 자의적으로 쟁취되었건, 타의적으로 이식되었건 간에, 2차 세계 대전 이후 현대국가로 탈바꿈한 한국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일본 사회에서는 "평화주의"가 각각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부각되기 시작했다는 점은 부정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약 70년에 가까운 세월에 걸쳐 이러한 논리가 계속적으로 확대・재생산된 결과, 대다수의 국민들이 이를 쉽게 받아들이는 수준에 이르게 된 것이죠. 이런 까닭에 일본 우익 중 일부는 이러한 일본의 "평화주의"를 GHQ의 사정에 의해 멋대로 심어진 세뇌라고 해석하는 시각도 버젓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평화헌법을 개정하고 보통국가화하려는 정치적 흐름의 뒷배경에 이러한 재해석이 존재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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