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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과학자들은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 것을 약 30만년 전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초기의 인류는 아프리카 지역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윽고 전세계로 뻗어나가게 되며, 지구상 곳곳에서 수렵 및 채집 활동을 영위하게 되죠. 이 당시 이미 석기와 불을 활용할 줄 알았고 개개인으로서는 현대의 프로 운동선수 급의 신체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상급 포식자인 호랑이나 사자, 곰 등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연약한 존재였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큰 무리를 이루고 유연하게 행동함으로서 먹이사슬의 최정상을 차지하게 됩니다. 

농경이 시작된 것이 빨라야 1만년 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 인류는 약 29만년 동안 위와 같은 수렵 및 채집활동을 본업으로 삼아왔습니다. 고향인 아프리카를 떠나 전 지구상에 걸쳐 번성할 수 있었으니, 우리 조상들은 그야말로 성공적인 동물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 시절 인류 각 개인이 소속되어 있었던 단체는 무엇이었을까요? 당연히 자기 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친근감이나 동질성을 느낄 수 있는 범위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자기 부족들과 교류하던 인근 부족들이나 구전으로 알게 된 형제・조상 부족 정도가 다였을 겁니다. 그 외의 인류는 미지의 존재이거나 경쟁자에 불과했으며 현대인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민족(Ethnic group)이란 개념은 이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만년 전 농경이 시작되면서 인간은 처음으로 방대한 양의 식량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농경으로 얻어지는 곡물은 고기나 과일에 비해 보존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장이라는 행위가 가능해짐에 따라 창고가 생겨났고, 그 창고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살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기존의 사냥 및 채집 무리의 규모를 크게 벗어난 일종의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 조직이 점차 효율을 높여나감에 따라 작은 촌락은 큰 마을로, 도시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국가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공동체 내에서의 활발한 문화교류는 집단 구성원의 소속감과 문화적 동질성을 제고시켰고, 그리하여 민족(Ethnic group)이라는 개념의 토대가 성립된 것입니다.

 

 

 

 우리가 민족(Ethnic group)이라는 개념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

현생 인류가 출현한 이래, 부족 단위의 공동체 의식은 항상 존재해왔지만 최소 29만년 동안 우리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극단적인 민족주의자일지라도 민족의 기원이 이 시기부터라고 주장하는 경우는 없죠. 그러나 농경이 시작되고 공동체의 단위가 확장되면서 개인이 동질감을 느끼는 범위가 점차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동족의식의 확장이, 집단생활로 인해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인지 아니면 통치효율을 위해 지배층에 의해 타의적으로 심어진 개념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만, 어찌됐건 근대 이후에 이르러 민족이라는 단어로 일컬어지기 시작한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이 민족이라는 단어로 국가(Nation)를 재정의함으로서, 근대 국가들은 전근대 국가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통치 효율성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20세기 이후 혈통을 통해 민족의 실체를 증명하려는 노력이 수도 없이 계속되었는데, 당연하게도 전부 다 허사로 끝났습니다. 하플로그룹 연구에서 알 수 있듯, 민족에 혈통적인 요소가 약간은 존재한다고 볼 수 있지만 우생학이나 파시즘에서 주장하는 것만큼 유의미한 수준은 절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농경이 시작된 이후 조선시대급의 쇄국정책이 전세계적으로 횡행하고, 그것이 수만년 이상 지속되었다고 가정하면 유의미한 수준의 유전적인 차이점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겠죠.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수렵 및 채집 생활이 지닌 태생적인 인구부양력의 한계로 인해 인류는 매우 낮은 인구밀도로 29만년 동안 살아왔고, 최근 1만년 정도부터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공동체 의식이 확장되고 오늘날 민족이라는 개념이 태동했습니다. 이처럼 민족은 어디까지나 후천적으로 발생한 개념이며 혈통 같은 실체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민족이 국가나 화폐처럼 일종의 창조과정을 거쳐 다듬어진 상상의 공동체라는 인식에 도달할 수 있게 되죠. 그렇기에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 민족의 정의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혈통이 아니라 집단적인 정체성이며, 문화나 언어 등의 요소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여기며 후퇴해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민족이라는 개념에 실체가 없다고 해서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결론에는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똑같이 물질적인 실체는 없지만 정치적 실체로서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국가나 그 자체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지만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교환수단으로서 통용되는 화폐처럼, 민족 역시 인류 사회에 지금까지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명심해야만 하는 점은 국가든 화폐든 민족이든 간에 원래부터 인류 사회를 지배해온 개념은 절대로 아니었으며, 인류사의 발전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일종의 도구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숙명적으로 인류를 지배해온 신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관념이 만들어낸 이상, 얼마든지 인간의 힘으로 다뤄낼 수 있으며 또 반드시 다뤄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과학과 문명의 발전에 의해 인간의 전지구적인 영향력은 나날이 늘어가고 있는 반면, 민족(Ethnic group)이나 국가(Nation)같은 개념은 특정 집단의 생존이나 번영에는 유리하게 작용할지는 모르나, 그것이 반드시 인류 전체의 공리(共利)와 합치된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사실을 경시하고 국가나 민족 개념에 지나치게 매몰되면 자칫 국수주의나 인종차별주의로 흘러버리기 쉬우며, 그로 말미암은 재앙은 세계대전이라는 형태로 폭주한 바가 있습니다. 심지어 이 비극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시대와 배경을 바꿔 반복되고 있는데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중화패권주의가 그 대표적인 갈래 중 하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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