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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중국을 보면 영토도 넓고 인구도 많으며 자원도 풍부하니, 강대국이 되기에는 이보다 더 적합한 나라는 찾기 힘들겁니다. 이런 우월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18~19세기는 중국의 암흑기였습니다. 아편전쟁, 청불전쟁, 청일전쟁에서 연달아 패배하며 국제사회에서의 권위가 급전직하했고 마카오, 홍콩, 타이완을 외세에 빼앗기는 등 굴욕의 연속이었죠. 이렇게 쇠락하게 된 원인으로서 자주 거론되는 논리가 바로 "청나라는 대외무역을 등한시했고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는 소극적이었기에 산업화가 늦어졌다" 인데 이는 사실과는 다릅니다. 

 청나라는 정말 대외무역을 등한시했을까?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보면 중국은 자국 내의 너무나도 풍부한 물산 때문에 스스로의 부에 완전히 만족해버린 탓에 외국과의 상업을 등한시한 탓에 고작 한 두군데의 무역항만 개항했었고 법률이나 조직체계에 결함이 있었기에 공정한 무역을 할수가 없다는 서술이 있습니다. 이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한데 이는 비단 애덤 스미스 뿐만 아니라 18~19세기 영국 지식인들이 중국에 대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시각이었으며, 그야말로 무식하고 편견에 가득찬 제국주의적인 주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영국 지식인들이 청나라에 대해 대외무역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고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전세계적으로 잘만 수출되던 영국제 공산품이 유독 청나라 시장만큼은 공략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대청무역적자가 계속되자, 그 이유를 청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물산에 만족해버린 나머지 질좋고 값싼 영국제 물품을 사지 않는다 or 청나라와 무역하는 교역항 수가 제한적이라 영국에 불리하다 or 청나라의 법률에 결함이 있다 라고 멋대로 단정짓고 정신승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영국이 청나라에 대해 지속적인 무역 적자를 기록한 것은 영국의 주력 수출품인 공업제품이 당시 청나라 제품의 가격경쟁력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당시 청나라는 사회전반에 사치풍조가 만연해 있는 상태였으며, 스스로의 풍부한 물산에 만족해 있지도 않았습니다. 청나라는 막대한 인구를 기반으로 한 가내수공업의 규모가 워낙 컸으며, 곡물 가격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도 동시기 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현저히 적었죠. 이 덕분에 굳이 기계장치에 의존하지 않아도 거의 초기 산업혁명급 가격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고, 이 탓에 중국이 영국산 공업제품을 수입할 가격 메리트가 거의 없었습니다.

 

 사실 청나라는 한중일 중에선 가장 적극적으로 서양과 교류했다

우리는 사실 이 지점에서 이상한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국부론의 출간시기는 1776년 3월 9일이며 이 당시 중국은 한중일 중 가장 적극적으로 서양과 교류한 나라였다는 점을요. 당시 조선은 빗장을 꽁꽁 닫고 있어 서양과의 통상조약은 커녕 직접적인 교류조차 하지 않았고, 청나라를 통해 간접적으로 신진문물을 들여오는 정도였습니다. 일본 역시 에도막부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네덜란드용 창구 데지마나 조선 통신사 같은 예외적인 소수의 사례를 제외하고는 모든 해외 교역을 중단한 상태였습니다. 물론 중국 역시 서양과의 교역은 오직 광저우 한 곳에서만 제한적으로 허용했지만 그 수준은 결코 조선급의 엄격한 쇄국은 아니었고, 일본보다 훨씬 개방적이었습니다. 

일본의 경우, 에도막부 이후 서양과의 무역항은 오직 나가사키의 데지마에만 한정하였는데 이때의 교역상대는 오직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하나뿐이었습니다. 더욱이 네덜란드 상선의 내항은 1년에 한 두 차례 정도로 제한되었고 그 수도 매번 수 척에 불과했기에 무역량은 미미한 수준이었습니다. 반면 청나라도 서양과의 교역을 광저우로 한정한 점은 일본과 동일하지만 감독역할인 청나라 관료와 지정된 상인에게 책임을 물게 하는 반관반민(半官半民)적인 관리무역 체제였으며, 유럽 상인들도 각자의 정부로부터 독점권만 취득하면 청나라와의 무역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교역기간이 정해져 있기는 했지만 서양과의 교역 규모 자체는 일본의 데지마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컸습니다. 

또 광저우에만 교역항을 제한한 이유도 흥미로운데 1685년에 강희제가 해금령을 해제하여 중국 상인들의 해외도항과 외국선박의 중국 내항을 허용한 이후, 중국의 여러 항구에 유럽과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상선이 쇄도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강남지방은 이미 일본과의 교역으로 문정성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일본과 중국의 교류가 어찌나 활발했던지 서양과의 교역항으로 알려진 나가사키에는 일년에 네덜란드 상선이 고작 수 척 정도 도래하는 수준이었지만 중국 상선은 그 수십 배가 되는 70∼80척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랬던 까닭에 서양인들마저 강남지방에만 집중되면 화남지방이 소외되어버려 국가 경제의 균형이 붕괴될 가능성이 있었고, 그러한 논리에서 청나라 측은 1757년부터 서양과의 무역을 광저우에만 한정하기로 한 것이죠. 

 

 

 

 정리

정리하자면, 정화의 원정 이후 명나라 시기부터 이어져내려오던 해금정책을 풀고 서양과의 교역을 시작한 점. 그렇다고 청나라와 서양과의 교역이 결코 작은 규모는 아니었다는 점. 지방 경제 발전을 고려해 교역항을 제한한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청나라가 대외무역에 관심이 없었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외무역에 주력한 국가라고 말하기는 힘들죠. 다만 산업혁명이 청나라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하지 못한 점에 대한 여러 이유들 중에서 적어도 무역만큼은 그 리스트에서 빠져도 상관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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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댄초이
    중국역사를 말할 때, 원나라 금나라 청나라 등 많은 북방민족의 식민국가였던 세월이 유구한데, 이상하게도 어떠한 역사책이나 역사서에도 중국이 식민지 상태라는 언급은 없더군요. 내가 이상한가요?
    1. EXㅣDB
      흥미로운 질문 감사합니다. 지배라는 측면에서 겉보기로는 비슷해보이지만, 유목 왕조들에 의한 중국 지배와 유럽 열강에 의한 식민지 지배는 정의상 많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식민지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 혹은 도시의 지배를 받는 영토" 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먼저 정복왕조였던 요, 금, 원, 청 모두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웠습니다. 더군다나 정복 왕조들이 중심지로 삼았던 지역이 바로 베이징인데, 북쪽에 치우쳐있기는 하지만 엄연히 중국 본토의 일부였죠.

      반면 대영제국이든 프랑스든 간에 식민지와 본토와의 거리는 매우 멀었고, 이들 국가의 정치경제문화적 중심지는 엄연히 유럽이었죠. 일본의 경우 조선과의 거리는 가까웠지만, 국가 중심지 자체는 여전히 일본 본토였기 때문에 조선이나 만주, 대만을 식민지화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2. 댄초이
      저는 님의 설명에 다른 생각입니다.
      베이징이 지금이야 중국의 수도입니다. 그러나, 베이징은 청나라의 수도이기 전에는 중국의 중심이 아니라, 북방 국경지대 부근인 경우가 많았고, 중국이 식민 상태이거나, 중국이 통일왕조가 아닌 분열상태일때는 항상 북방민족의 차지였습니다. 동아시아 역사가 너무 중국중심으로 서술되어있고, 현재 북방민족이라고 할만한 민족들이 그 지역에서 모두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중국이 좀 더 자신의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경은 중국의 영토 속에서 수도인 적은 만주족이 설립한 청나라가 거의 유일합니다. 만주에서 가깝기 때문에 북경으로 정한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이집트나 그리스는 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인근 아랍이나 터키의 지배를 받았고, 우리는 그들이 장기간의 식민역사가 있다는 것으로 배웠습니다. 왜 그들은 바로 옆나라 민족들에게 먹혔는데 식민역사로 불리나요?
    3. EXㅣDB
      일단 팩트를 먼저 짚고 넘어가죠. 베이징은 춘추전국시대에는 전국 7웅이었던 연나라의 도읍으로 연경(燕京)으로 불렸고요, 거란이 세운 요나라 때는 수도는 상경이었지만 행정적 중심지는 베이징이었습니다. 금나라 때는 중흥대흥부라는 이름으로 베이징이 수도였으며 원나라 때도 베이징을 대도(大都)라고 부르면서 수도로 삼았습니다. 정복 왕조이기는 하지만 베이징은 이 원나라 때 처음으로 중국 전체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이후 원나라를 몰아낸 명나라도 영락제 시절부터 베이징을 수도로 삼았으며 유명한 자금성도 이때 건설되죠. 청나라 때는 언급하신 대로이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또 베이징이 수도가 되죠.

      또 베이징을 중심으로한 하북지방은 생각하시는 것만큼 "변경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엄청나게 넓은 평야를 바탕으로 고대 중국 시절부터 관중, 중원과 더불어 가장 풍요로웠습니다. 삼국지만 봐도 하북을 장악한 원소가 당대 최강의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고, 그 원소를 쓰러뜨린 조조가 위나라를 세우게 된 것만 봐도 답이 나옵니다.

      개인이 어떻게 느끼고 해석하고 간에 상관없이, 그저 정복왕조들에 의한 중국지배가 "식민지"라는 오늘날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님께서 읽으신 역사책에 중국이 식민지 상태라는 언급이 없는 겁니다. 역사책을 쓰는 저자 입장에서 볼 때, 문학적 표현으로서의 정복당한 중국에 대해 "식민지"라는 표현은 쓸 수 있을지라도, 명확한 정의가 필요할 때는 그 단어를 쓸래야 쓸수가 없습니다. "식민지"라는 오늘날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으니까요. 딱히 중공이 세계적으로 로비활동을 벌여서 그런건 아닙니다.

      그러나 현재 북방민족이라고 할만한 민족들이 그 지역에서 모두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중국이 좀 더 자신의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는 점은 동의합니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지는 법이고, 정복왕조와 한족의 대결에서는 한족이 이겼으니까요. 다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서가 다 조작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떤 기록이든 간에 교차검증을 해가며 신뢰도를 높이는 게 역사학입니다.

      또 옆나라 민족들에게 지배당했는데 식민역사로 불리느냐는 질문을 하셨는데, 제가 위의 댓글에서 이미 일본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 것과 같이, 거리가 가깝더라도 국가 중심지가 지배지로 이동하지 않으면 식민지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댄초이
      와우...우선 역사책을 쓰실 정도의 저자와 논쟁아닌 논쟁을 하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위에 지적하신 내용중에 실제로 '식민지'라는 용어를 학술적으로 사용하려면, '국가의 중심지가 식민지로 이동하지 않아야 식민지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선뜻 동의하기 어렵습니다만, 학술적으로 이렇게 결론이 난 정의라면 그렇게 알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님과 다른 의견을 버리지못하겠습니다. 왜냐면, 지금은 사라진 북방유목민족입장에서 보겠습니다.

      언급하신 왕조만 보더라도 전국7웅 연나라, 거란 요나라, 여진의 금(후금), 몽골 원나라, 청나라까지 다 합치면 이 지역을 실제 지배한 민족은 중국한족이 아니라, 북방민족입니다.

      그리고, 중국한족의 발원지는 아시다시피 중원으로 불리는 황허강 상류 내륙으로 베이징에서는 아주 먼 지역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북방민족입장에서는 베이징을 수도로 두는 것이 자기 원래 땅을 수복하고 최남단으로 수도를 옮긴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국을 감시하고 경제적인 컨트롤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중국을 다스리려면 자신들의 중심지였던 북방에 수도를 두고는 중국을 다스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즉, 북방민족입장에서는 중국땅으로 자신들의 중심지를 옮긴 게 아니라, 원래 자신의 땅이었던 곳에 수도를 삼은 겁니다.

      베이징은 북방민족입장에서는 중국으로 들어가는 남쪽 국경부근에 있고, 중국 한족입장에서는 북방민족과 부딪히는 북쪽 한계선 부근에 있는 겁니다. 물론, 원나라 이후 북방경계가 더 위로 올라가긴 했지만, 그 이전에는 북경지역이 상호 전략적인 요충지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 점은 중국이 원나라 몽골족에 깊이 감사해야할겁니다.

      저는 북경이 고대부터 북방민족의 땅이며, 중국을 지배하고자 최대한 남쪽에 세운 중심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태동한 중심지는 훨씬 더 위에 있지만, 그렇게 따지면 중국 한족도 자신들의 태동한 곳은 훨씬 서쪽에 있습니다. 북경은 두 세력이 서로 부딪히는 곳일 뿐입니다.

      중국입장에서야 북방민족들을 모두 흡수해버렸으니, 이제 북방민족의 역사도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고대 예맥족인 한민족 입장에서, 우리와 북방민족은 사촌지간인 셈인데, 우리가 중국의 역사관에 따라갈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제 주장이 억지스럽나요?
    5. EXㅣDB
      오해를 하시고 계신데, 저는 역사책을 쓰는 저자가 아닙니다. 상기 "역사책을 쓰는 저자 입장에서 볼 때" 라는 표현은 "from the viewpoint of the historians"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래도 중국의 역사를 한족과 북방민족의 대결구도로 이해하고 계신듯하네요. 게다가 베이징이 고대부터 북방민족의 땅이며 연나라마저 북방민족이라고 주장하시니, 아무래도 북방민족에 대한 정의가 제가 알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용어가 통일되지 않은 상태에서 뭔가를 논한다는건 어불성설이니, 먼저 북방민족에 대해 어떻게 정의하시고 계신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식민지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문학적 표현으로서 "중국 본토는 유목정복왕조들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처지였다."라는 식으로 쓰시는 거라면 아무도 태클을 걸지 않습니다. 다만 "중국 본토는 유목정복왕조들의 식민지였다."라고 하시면 안되는 것 뿐이죠. 당장 제 글 중에서도 "오키나와 경제 # 3 오키나와 경제의 역사적 배경"을 보시면 "오키나와를 식민지처럼 대했습니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실제로 이때 일제는 오키나와를 일본의 지방 현으로 복속한 것일뿐이었기 때문에 식민지였다는 표현 대신 식민지처럼 대했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6. 댄초이
      긴 설명 감사합니다.

      어차피 서로 평행선이니 여기서 토론을 끝내자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다만, 한가지만 짚자면, 위에 언급하신 "연나라마저 북방민족이라 주장하시니, 아무래도 북방민족에 대한 정의가 제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고 느낍니다" 라고 적으셨습니다.

      저는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춘추시대 북방을 거의 장악하다시피한 선비족의 연나라, 우리가 역사책에서도 가끔 들은 모용씨 가문의 전연, 후연, 서연, 남연 등을 분명히 선비족의 나라입니다. 선비족의 원 근거지는 지금의 몽골초원과 약간 남쪽의 광활한 지역입니다. 선비족 역사도 중국역사인가요? 선비족은 분명히 맥족으로 분류됩니다.
    7. 댄초이
      제가 글을 빨리 읽다보니 잘못 이해했네요. 토론 끝내자고 하신적없으시네요. 그냥 제가 끝내고 싶었나봐요 ㅎㅎ. 그나저나 북적 이라는 용어 자체는 중국이 자산들 북쪽에 사는 세력을 싸잡아 낮춰 부르는 말인데, 북쪽 오랑캐 라는...이런 용어는 언급 자체를 하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이쯤에서 제가 먼저 그만하자고 말씀드리고자합니다.
  2. 아하
    정말 재밌는 토론 주제입니다. 저도 좀 끼어들어볼까 해요.
    저도 이 문제를 오랜 동안 생각해왔거든요.
    우선 제대로된 논의를 하자면 "중국"이라는 나라 이름과
    지금 중국이 차지하고 있는 땅이름을 좀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차이나 대륙, 만주. 이렇게 구분을 하고요.
    진시황이 쌓았다는 만리장성을 경계로 그 아래 쪽을 차이나 대륙이라고 하고 위쪽을 만주라고 하면
    차이나 대륙 지배계층(역사기록자들)의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에 부합하는 것 아닌가 싶어요.

    그렇게 보면, 만주대륙의 주인들이 차이나대륙 사람들을 점령하고 지배해온 역사가 선명하게 드러나죠.
    그걸 식민지라고 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인데,
    그게 바로 역사를 보는 관점....이라고 생각해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이 이 난제를 해결하느라 역사공정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하는 거죠.
    전통적인 화이관...하화족과 오랑캐로 구분해서 보는 시각으로는
    역사를 통합할 수도 없고, 현재의 국가를 유지하기도 어렵겠죠.
    그러니, 국가주의 관점에서, 원래 우리는 하나였다.
    하나의 나라에 여러 민족이 쟁투하며 살아왔다.
    마치 우리가 삼국시대의 세 국가를 다 우리 민족사로 통합적으로 인식하듯이
    중국도 하화족 중심의 민족사관을 버리고 국가주의 사관으로 전환한 것이죠.

    그러면, 우리는, 그들(하화족과 만주 제민족)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차이나 대륙을 지배했던 만주 사람들... 을 우리를 괴롭힌 이민족으로 볼 것인가?
    뿌리를 공유하는 형제로 볼 것인가?
    완벽한 이민족으로 담을 친 자들은 이마니시 류(금서룡) 같은 일본 사람들과 이병도 같은 그들의 제자들이었고
    하나의 뿌리를 공유하는 형제로 본 사람들은 단재 신채호, 정인보, 석주 이상룡 선생 같은 독립운동가들이었습니다.
    역사는 팩트 자체가 아니고 팩트를 둘러싼 해석이라고 봐야겠죠.
    우리가 어떤 관점을 가질 것인가...이것이 우리의 숙제로 남아 있다...
    저는 그리 생각해요.
    1. EXㅣDB
      저는 그 모든 문제에 대한 가장 손쉽고, 또 가장 진실에 가까운 해답은 우리 모두가 자신의 뿌리를 올바르게 인식하는데 있다고 봅니다. 현생 인류는 3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출현했고, 대략 10만년 전후로 아프리카를 벗어났으며 중국에 도달한 건 5만년 전 정도이며 한반도에 도달한 건 아주 길게 잡아야 2만년 전입니다. 농경이 시작된 건 1만년 전부터이며, 그 전에는 모두가 공평하게 전 지구상에서 부족 단위로 수렵/채집하며 살았으므로 민족이나 국가같은 개념 따윈 없었습니다.

      농경이 시작된 이후부터 집단 생활의 규모가 커지면서 문화적 동질성과 공동체 의식이 강화되면서 오늘날의 민족이나 국가 개념으로 발전한 것이죠. 민족 민족하지만 원래부터 민족이 있었던 건 아니며, 우리 모두는 한 뿌리에서 갈라져서 나왔고 분화된 것도 상당히 최근 일이라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는 과학적 진실입니다. 중국에서야 정신나간 베이징 원인 중국인 기원설 같은걸 밀어붙이는데, 이는 모두의 조롱거리가 되어 있는 상태죠. 즉, 민족이나 국가 같은 개념에 지나치게 매몰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2. 댄초이
      EX/DB님, 원론적인 말씀을 해주셨네요. 민족이나 국가 같은 개념에 지나치게 매몰될 필요가 없다.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학술적으로는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 혈통적으로 현재의 한국인은 주로 한반도에 살면서 북방계와 남방계의 짬뽕일겁니다. 한민족이라는 개념을 백성들이 가진 것도 통일신라시대라고 하니까요.

      중국은 항상 두려운 겁니다. 자신들의 역사만 봐도 통일 왕조 이후에는 항상 분열되었다가 다시 통일되었으니까요. 과거에는 북방민족에 국토의 전부 혹은 절반 이상을 내주고는 했기에, 지금도 그것이 두려워서 동북공정을 위시한 역사공정을 하는 겁니다.

      솔직히 우리도 북방(만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고조선, 고구려, 백제, 부여, 발해 등에 대한 사료가 너무 없어서 불리한 면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21세기에 쓸데없는 짓일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분쟁만을 낳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상대방(중국)의 지속적이고 국가적인 역사왜곡 공격에 대해서 어느정도 방어는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역사의 절반은 식민지 역사라는 저의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냥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북경이북, 만리장성부근이 그 역사적인 경계라고 봅니다. 21세기 어느 때에 혹시 평화적으로 중국이 여러나라로 분열되는지도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중국 경제가 혹시 크게 흔들려 국가(공산당)에 대한 충성도가 떨어지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분열이 올 수 있습니다. 미국이 그걸 모를리가 없습니다. 너무 멀리 간 거 같네요 쓰다보니 ㅎㅎ.
  3. 아하
    모두 동의할 수 있는 말씀이에요.
    다만, 문제는 뭐냐면 사실과 다른 정보로 교육을 하고 교육을 받고 자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전인수식의 역사해석을 아직 판단력이 없는 아이들에게 가르쳐서 컨센서스를 만들어버리는 것,
    저는 이게 큰 문제라 생각하고
    저역시 그 피해자의 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정말 긴 시간 학습을 안 할 수 없었던 거죠.
    1. EXㅣDB
      저 역시 청산리 대첩의 진실을 알고 충격받은 적이 있었죠. 결국 역사라는 분야에서 자꾸만 특정 집단 또는 국가가 이해관계를 추구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역사왜곡을 해도 영화 남한산성을 보고 충격을 받는 중국인들처럼, 조금만 외부의 지식을 습득해도 무용지물이 되는 바보짓인데 말이죠.
  4. 말랑브로
    댓글의 수준이 너무 높으시네요 다들.. 청나라는 조선 일본 사이에서 서양과 가장 많이 교류했다라는 사실 만으로 만족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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