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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중국을 보면 영토도 넓고 인구도 많으며 자원도 풍부하니, 강대국이 되기에는 이보다 더 적합한 나라는 찾기 힘들겁니다. 이런 우월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18~19세기는 중국의 암흑기였습니다. 아편전쟁, 청불전쟁, 청일전쟁에서 연달아 패배하며 국제사회에서의 권위가 급전직하했고 마카오, 홍콩, 타이완을 외세에 빼앗기는 등 굴욕의 연속이었죠. 이렇게 쇠락하게 된 원인으로서 자주 거론되는 논리가 바로 "청나라는 대외무역을 등한시했고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는 소극적이었기에 산업화가 늦어졌다" 인데 이는 사실과는 다릅니다. 

 청나라는 정말 대외무역을 등한시했을까?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보면 중국은 자국 내의 너무나도 풍부한 물산 때문에 스스로의 부에 완전히 만족해버린 탓에 외국과의 상업을 등한시한 탓에 고작 한 두군데의 무역항만 개항했었고 법률이나 조직체계에 결함이 있었기에 공정한 무역을 할수가 없다는 서술이 있습니다. 이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한데 이는 비단 애덤 스미스 뿐만 아니라 18~19세기 영국 지식인들이 중국에 대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시각이었으며, 그야말로 무식하고 편견에 가득찬 제국주의적인 주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영국 지식인들이 청나라에 대해 대외무역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고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전세계적으로 잘만 수출되던 영국제 공산품이 유독 청나라 시장만큼은 공략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대청무역적자가 계속되자, 그 이유를 청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물산에 만족해버린 나머지 질좋고 값싼 영국제 물품을 사지 않는다 or 청나라와 무역하는 교역항 수가 제한적이라 영국에 불리하다 or 청나라의 법률에 결함이 있다 라고 멋대로 단정짓고 정신승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영국이 청나라에 대해 지속적인 무역 적자를 기록한 것은 영국의 주력 수출품인 공업제품이 당시 청나라 제품의 가격경쟁력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당시 청나라는 사회전반에 사치풍조가 만연해 있는 상태였으며, 스스로의 풍부한 물산에 만족해 있지도 않았습니다. 청나라는 막대한 인구를 기반으로 한 가내수공업의 규모가 워낙 컸으며, 곡물 가격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도 동시기 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현저히 적었죠. 이 덕분에 굳이 기계장치에 의존하지 않아도 거의 초기 산업혁명급 가격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고, 이 탓에 중국이 영국산 공업제품을 수입할 가격 메리트가 거의 없었습니다.

 

 사실 청나라는 한중일 중에선 가장 적극적으로 서양과 교류했다

우리는 사실 이 지점에서 이상한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국부론의 출간시기는 1776년 3월 9일이며 이 당시 중국은 한중일 중 가장 적극적으로 서양과 교류한 나라였다는 점을요. 당시 조선은 빗장을 꽁꽁 닫고 있어 서양과의 통상조약은 커녕 직접적인 교류조차 하지 않았고, 청나라를 통해 간접적으로 신진문물을 들여오는 정도였습니다. 일본 역시 에도막부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네덜란드용 창구 데지마나 조선 통신사 같은 예외적인 소수의 사례를 제외하고는 모든 해외 교역을 중단한 상태였습니다. 물론 중국 역시 서양과의 교역은 오직 광저우 한 곳에서만 제한적으로 허용했지만 그 수준은 결코 조선급의 엄격한 쇄국은 아니었고, 일본보다 훨씬 개방적이었습니다. 

일본의 경우, 에도막부 이후 서양과의 무역항은 오직 나가사키의 데지마에만 한정하였는데 이때의 교역상대는 오직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하나뿐이었습니다. 더욱이 네덜란드 상선의 내항은 1년에 한 두 차례 정도로 제한되었고 그 수도 매번 수 척에 불과했기에 무역량은 미미한 수준이었습니다. 반면 청나라도 서양과의 교역을 광저우로 한정한 점은 일본과 동일하지만 감독역할인 청나라 관료와 지정된 상인에게 책임을 물게 하는 반관반민(半官半民)적인 관리무역 체제였으며, 유럽 상인들도 각자의 정부로부터 독점권만 취득하면 청나라와의 무역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교역기간이 정해져 있기는 했지만 서양과의 교역 규모 자체는 일본의 데지마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컸습니다. 

또 광저우에만 교역항을 제한한 이유도 흥미로운데 1685년에 강희제가 해금령을 해제하여 중국 상인들의 해외도항과 외국선박의 중국 내항을 허용한 이후, 중국의 여러 항구에 유럽과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상선이 쇄도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강남지방은 이미 일본과의 교역으로 문정성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일본과 중국의 교류가 어찌나 활발했던지 서양과의 교역항으로 알려진 나가사키에는 일년에 네덜란드 상선이 고작 수 척 정도 도래하는 수준이었지만 중국 상선은 그 수십 배가 되는 70∼80척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랬던 까닭에 서양인들마저 강남지방에만 집중되면 화남지방이 소외되어버려 국가 경제의 균형이 붕괴될 가능성이 있었고, 그러한 논리에서 청나라 측은 1757년부터 서양과의 무역을 광저우에만 한정하기로 한 것이죠. 

 

 

 

 정리

정리하자면, 정화의 원정 이후 명나라 시기부터 이어져내려오던 해금정책을 풀고 서양과의 교역을 시작한 점. 그렇다고 청나라와 서양과의 교역이 결코 작은 규모는 아니었다는 점. 지방 경제 발전을 고려해 교역항을 제한한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청나라가 대외무역에 관심이 없었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외무역에 주력한 국가라고 말하기는 힘들죠. 다만 산업혁명이 청나라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하지 못한 점에 대한 여러 이유들 중에서 적어도 무역만큼은 그 리스트에서 빠져도 상관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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