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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과거에는 서양문명의 정의를 그리스까지만 한정했을까?
사실 서양문명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쉽게 떠오르는 지역은 서유럽일 겁니다. 실제로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이 세계를 좌지우지하던 20세기 중반까지만해도 서양문명이란 곧 서유럽 문명을 뜻했습니다. 그리고 이 서유럽 문명의 뿌리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로마 시대에 국한되어 있었죠.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미개한 중동 문명과 위대한 서양문명 사이에 명확한 선긋기를 함으로써, 그 밖의 문명들에 대한 유럽문명의 우월성을 반증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사실 이 시점의 서유럽 서양문명은 매우 편협한 정의였습니다. 서양문명을 단일하고 연속적인 문화로 이해한 나머지 서양문명에 대한 비잔티움과 이슬람의 결정적인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래 서양문명의 시작을 그리스로 잡기 시작한 것 자체가, 19세기에 발생한 헬라스주의의 영향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를 서양문명의 시작으로 잡는 그 인식은, 인종주의와 민족주의가 가장 극심하게 횡행하던 20세기 초중반까지 그야말로 상식이었습니다. 이 시점의 유럽인들에게 있어 중동문명은 빛나는 그리스와 로마의 위광에 비하면 그저 후진적이고 미개한 존재였고, 이들을 자신들의 뿌리라고 삼는 것은 사회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있는 지점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눈에서 보면 페르시아인이나 프랑스인이나 그게 그것처럼 보이겠지만, 인종주의와 민족주의가 판을 칠때까지만해도 중동인은, 유럽인들에겐 동아시아인들과 크게 다를바없는 미개한 야만인으로 비춰졌으니까요.
아주 비슷한 예가 우리 주변에 있는데, 바로 일본입니다. 일본 고대사를 살펴보면 수렵 및 채집생활을 영위했던 죠몬인들이 원주민으로서 일본 열도에 살고 있었는데, 진보된 도구와 농경기술을 갖춘 야요이인들이 기원전 10세기 쯤부터 일본 본토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일본 문명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었죠. 그런데 과거 일본 사학계에서는 이 야요이인들의 정체가 바로 중국인이었다는 것이 정설이었습니다. 고대 한반도 문화와 일본 문화의 유사성이나 백제와 왜와의 관계를 감안하면 한국인이 야요이이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일본인들은 중세 이래로 계속해서 자신들이 한국인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미개한 한국인들로부터 문화와 기술을 전수받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죠.
그래서 임나일본부설 같은 황당한 역사조작을 하거나, 심지어 몇몇 일본 학자들은 야요이인들이 시베리아, 만주, 중국 대륙 남부에서 직접 건너왔다는 엉터리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서 고고학적 증거가 쌓이고 또 한국인과 일본인의 DNA 분석이 완료되면서, "야요이인=한반도인"라는 설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시점에 이르자, 결국 모두가 인정할 수 밖에 없어진 것이죠. 즉, 과거 일본인들이 야요이인들과 한반도인들이 관계가 없었다고 주장하며 선을 그었던 행위는 결국 자신들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한 행위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근대 서양 지식인들이 서양문명을 그리스에만 한정지었던 것도, 미개한 중동 문명과 위대한 서양문명은 관계가 없으며 자기들이 우월하다는 주장의 근거로도 사용되었죠.
현대의 서양문명에 대한 정의가 변화한 이유
하지만 여러 고고학적 증거가 쌓이고 수많은 연구결과가 축적되면서 서양문명을 둘러싼 정의가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서유럽만을 서양문명의 중심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서유럽 문명 이외의 문명의 서양 문명에 대한 기여를 축소시키며, 그 결과 서양문명의 발전역사를 객관적으로 조망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즉, 서유럽보다 더 넓은 지리적・문화적 맥락 속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서양문명 특유의 다양성 측면을 간과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현재 서양문명에 속하는 문명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들은 절대 같지 않습니다. 우리가 손쉽게 서양문명이라고 큰 범주에 묶고, 또 그 안에서 2천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같은 문명권을 공유했던 국가들-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조차 그 면면을 살펴보면, 서양문명이라는 큰 틀에서는 연속성을 공유하고 있지만, 언어나 문화, 관습 등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로마로부터의 문명과 토착 문화 및 습속이 결합하게 되었고, 그 결과 각 나라별로 독특하면서도 독자적인 문명이 형성되었기 때문이죠.
즉, 서양문명이라는 큰 틀에서의 문화적 연속성이 존재하지만 그와 동시에 문화적 다양성도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서양사학계는 서양문명이라는 개념 자체를 단일 정체성을 지닌 하나의 독립된 문명이 아니라, 내부에서 상호작용하는 복수의 문명으로 재정의하고 있습니다. 즉, 현대 서양사학계가 논하는 서양문명은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입니다. 그리고 이 복수의 문명들이 상호의존 및 상호작용함으로서 오늘날의 서양문명이 빚어졌다는 설명이죠. 이로서 서유럽 문명만을 서양문명의 적자로 여기던 편협된 시각에서 벗어나, 비잔티움과 이슬람의 현대 서양문명에 대한 기여를 조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서양문명의 기원을 그리스에서만 한정짓던 과거의 행태에서 벗어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로 대변되는 중동 문명에서 서양 문명의 뿌리를 찾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그리스 로마 문명이 이집트 및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결코 독립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미 입증된 상태입니다. 오히려 그리스 문명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으로부터 여러 문명을 수입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이 현재는 정설로 대접 받고 있죠. 물론 기존의 서양문명의 뿌리로 정의되었던 고대 그리스 문명과 중동 문명의 성질이 온전히 같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문자, 종교, 수학, 천문학, 공학 등 중동문명의 유산은 그리스 문명으로 충분히 이어졌으며, 실질적인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인식되기 때문에 최근 서양사학계에서는 서양문명의 정의를 점차 넓히는 추세에 있는 것이죠. 즉, 현대 서양문명의 모태라고 하는 그리스 문명은 독자적으로 발전하기 보다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으로부터 여러 문명을 수입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놀라울 정도로 현대 서양문명들의 계승과정과 유사합니다. 현대 서양문명들 역시 그리스・로마로부터의 문명과 토착 문화 및 습속이 결합하여 독자 문명이 형성된 것인데, 고대 그리스 문명 또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로부터 전래받은 문명과 그리스의 토착 문화 및 습속이 결합하여 발전하고 형성된 것이니까요. 결국 현대 서양사학계가 서양문명에 대한 정의를 확대하는 기조는, 과거 서양문명이 그리스와 로마에서 기원을 찾았던 것과 그 궤를 같이합니다.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예외입니다만) 유럽 각국들이 지리적/인종적 상관관계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와 로마를 서양문명의 뿌리라고 여기고 이를 서양문명으로 편입한 것처럼, 그 연장선상에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서양문명이라는 범주로 묶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범주묶기는 서양문명이라는 정의 자체를 확대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즉, 이전까지는 "그리스・로마로부터의 문명과 토착 문화 및 습속이 결합한 문명" 만을 서양문명의 대상으로 했다면, 이제는 "이집트・메소포타미아・그리스・로마로부터의 문명과 토착 문화 및 습속이 결합한 문명"이 서양문명의 대상이 되는 것이죠. 다만 그렇다고 해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이집트 문명, 이슬람 문명의 정체성이 상실되는 건 아닙니다. 서양문명의 일원이라는 프랑스 문명, 영국 문명, 독일 문명이 특별한 정체성의 훼손없이 독자성을 띄고 있으며 이들에게 그저 서양문명이라는 타이틀이 달린 것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에도 서양문명이라는 타이틀이 하나 더 달리는 것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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